[작은에세이]어제보다 강한 오늘-이건휘 충남 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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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에세이]어제보다 강한 오늘-이건휘 충남 협회장

한국지체장애인협회 0 2494


작은 에세이

어제보다 강한 오늘



이건휘 충청남도지체장애인협회장

거친 바람 속에서 단련된 강인한 생명력
1954년 충남 부여군에서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나는 2살에 소아마비를 앓았다. 고열을 앓은 후 전신마비가 와 병원과 용하다는 굿당까지 찾아다니며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해봤으나 차도가 없었다. 죽을 것이라 생각해 출생신고도 않은 채 숨만 쉬고 살아가던 내게 기적이 찾아 온 것은 6살 때였다.

두 팔과 한쪽 다리의 신경까지 돌아왔다. 그러나 그 기적 이후로도 나는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멀리 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초등학교를 다니는 것도, 뒤늦은 출생신고로 6살 어린 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것도 적응하기 어려워 스스로 학업을 포기했다.

그렇게 사춘기를 맞이했다. 내게 미래는 삶을 포기하는 것, 죽음뿐이었다. 그 때 두세 번 극단적인 행동도 시도했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모질게 끊으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거친 삶이 계속되던 어느 날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1970년 초, 쓸쓸한 저녁에 부모님께서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어머니께서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하셨다. 당분간 동생들을 잘 보살피라고, 자리 잡으면 연락하겠다고 하시고 떠나셨다.

지금 생각하니 건설업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사업에 실패하셨던 모양이다. 하루아침에 가장이 된 나는 세 명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을 굶길 수 없기에 품팔이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그때의 시련이 지금의 강인한 나를 만들었다.

청춘의 땀 흘려 일군 사업 성공
세월이 흘러 3년 뒤, 공주에서 우리가족은 다시 함께 살게 됐다. 나는 ‘부여상회’라는 상호로 첫 사업장을 오픈하고, 동네 새마을 구판장을 찾아다니며 단골을 확보했다. 제법 번창해 2~3년 만에 직원을 채용할 만큼 성장했다. 나는 바쁜 와중에도 늦은 밤과 새벽 시간을 활용해 독학을 했고, 소년시절 학업을 포기했던 아쉬움을 만회하듯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사실 난 불편한 몸으로 육체적인 노동이 뒤따르는 잡화상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 신체적 조건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한 직업을 찾다 학원사업을 시작했다. 1979년 7월 29일, 새롭게 시작한 학원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백제웅변학원, 백제입시학원, 백제컴퓨터학원, 백제독서실 등 학원하면 백제학원이라고 할 만큼 공주 제일의 학원으로 우뚝 섰다.

내 인생의 황금기였던 29살 건장한 청년시절, 어느 날 제자가 느닷없이 자그마한 소녀를 데려 왔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귀여운 소녀! 제자의 누나였다. 그녀는 내가 흘리는 땀에서 매력을 느꼈고, 나는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애정을 느꼈다. 우리의 사랑이 깊어 갈 때쯤 그녀의 부모님께서 극심한 반대를 했다. 난 내 불편한 신체조건 때문에 그녀를 잡을 수 없었지만, 그녀의 결심은 완고했다. 우리의 사랑은 커져만 갔고, 1981년 3월 25일, 결혼식을 올렸다. 고등학생처럼 귀엽고 자그마한 아내는 1남 2녀를 낳았다. 아내는 여린 몸으로 시집와 고맙게도 3명이나 되는 자녀를 낳아서 잘 키워 주었다.
장애인복지 활동에 뛰어들다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 한국지체장애인협회에서 함께 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살기 위해 바빴던 나는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조차도 잊고 살았다. 그러나 방황하던 시절 장애로 인해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고, 힘겹게 싸워 이겨야 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나와 같은 이들을 대변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1990년 충청남도지체장애인협회(이하 충남지장협)에 들어왔다. 그런데 조직은 전무하고, 회원 하나 없는 사막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미약한 힘이라도 뭉치면 강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밤낮 가리지 않고 조직화에 전념했다.

한 가지에 몰입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인 나는 학원사업까지 정리하고 협회 일에 전념했다. 그때부터 강력하게 구성한 조직력이 지금의 기틀이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뛰던 와중에 1995년 6월 27일, 전국동시 지방자치선거에서 조직과 능력을 인정받아 장애인으로는 최초로 충남 도의원 비례대표를 배정 받았다. 당을 대표해 라디오 연설, TV 연설, 정당 연설을 하러 각 지방을 누비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1996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기념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또 다른 중요한 성과는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충남지장협에서 장애인종합복지관을 수탁 받은 일이다. 그것을 계기로 현재는 장애인복지관 5곳을 비롯해 총 12개의 복지시설을 수탁 받아 운영하고 있다. 나와 충남지장협이 흘린 땀을 바탕으로 이제는 충남의 장애인복지가 전국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내 인생에도 최대 고비가 찾아왔다.

장애인복지에 대한 다양한 활동을 펴 나갈 즈음, 행정에 대해 무지했고 융통성을 부린다며 원칙을 지키지 않았던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모두 내 맘 같은 줄 알고 베푼 일들이 결국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하는 오점으로 남았다. 나는 비통한 심정으로 3년간 야인 생활을 했다. 그 힘든 시간이 독이 되느냐 약이 되느냐는 오로지 내게 달린 일이었다. 억울함만 토로하기 보다는 자신을 반성하며 상대를 이해하려 했고, 무기력하게 지내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하며 장애인복지의 청사진을 그렸다.

‘원칙을 지키는 삶’ 강조
그 후로 충남지장협에 돌아와 지금까지 몸담고 일하고 있다. 장애인복지를 위해 일한지 25년,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보람 있는 일이 더 많았다. 사비를 털어 장애인복지시설인 삼휘복지재단을 설립한 일, 그곳에 중증장애인 요양시설, 실비시설, 보호작업장, 단기시설, 주간보호시설을 설립해 장애인들과 함께 보금자리를 만들어왔다.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나 자신은 열심히 살았노라 자부한다.

이 시점에서 전국의 장애인지도자분들께 부탁할 것이 있다. 원칙에서 벗어나지 말라.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용서하지만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의 잘못과 무능이 있어도 이해하고 다독이지만 자식은 부모의 무능을 원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라. 또 새벽에 일어나는 지도자가 되지 말고, 새벽을 깨우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항시 부지런해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도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도자는 늘 공부를 해야 하며, 잘된 것은 받아들이고 잘못된 것은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나는 배우고 익히는 점에서 아직도 배가 고프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쉼 없이 충남의 장애인복지와 협회 발전을 위해 연구하고 기획하고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내일도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로,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을 위해 달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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